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케메네스 왕조 (문단 편집) === 엄청난 경제적 풍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eysam-keshavarz-01-02-nations-interior.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eysam-keshavarz-01-04-apadana-interior.jpg|width=100%]]}}}|| ||||<#AC0D0A> '''{{{#FED600 페르세폴리스의 황궁 복원도}}}''' |||| 아케메네스 왕조가 누린 경제적 풍요와 부는 실로 엄청났다. 당시 [[곡창지대]]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이란]] 지역, [[인더스강]] 유역을 모조리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다른 문명권을 살펴보자면 유럽은 [[로마 제국]]이 탄생하지도 않아 풍요로운 프랑스의 옥토가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었고, 근대를 주름잡게 되는 독일 지역은 [[게르만족]]들이 사는 위험한 산림 지역이었다. 중국 역시 과거부터 개발되었던 [[중원]]을 제외하면 밀림이 우거져 있어서 경작지가 부족했으며 현재에는 곡창지대인 강남, 양호, 사천 지역 등 [[장강]] 유역은 지금의 [[아마존]] 같이 정글과도 같은 곳인 데다 이민족이 우글대는 미지의 땅이었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오랜 시간 개간과 관개 시설 개발을 마친 매우 부유한 지역 여러 곳을 독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예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겨울 수도인 [[슈쉬|수사]]를 점령했을 때는 5만 [[달란트|탈렌트]]어치의 은괴를,[* 탈렌트는 무게의 단위로 60[[파운드]]=960[[온스]]에 해당한다. 즉 5만 탈렌트는 2020-07-27 현재의 가치로 11억 7624만 [[미국 달러|USD]]에 해당한다. 고대의 경우 은의 가치가 현재보다 10배 정도 높았음을 감안하면 금액은 더욱 커진다.] 페르시아 제국의 의례적·종교적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아케메네스 왕조는 수도가 여러 곳이었다. 행정 수도 [[바빌론]], 겨울 수도 [[슈쉬|수사]], 여름 수도 [[엑바타나]], [[왕도]] [[페르세폴리스]]가 있었다.]를 점령하고 나서는 12만 탈렌트어치의 금화를 차지했다. 12만 탈렌트는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아테네의 1년 재정보다 무려 300배나 많은 수치였다.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부유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페르세폴리스가 갖고 있었던 경제력은 그리스 전체를 합친 규모보다 훨씬 거대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는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의 일이다. [[다리우스 3세]]가 용병을 고용하고 농민 10만 명 이상을 징집하는 등의 군비로 사용한 돈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국고가 남은 것이다. 여기서 1탈렌트의 가치가 얼마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그리스인들끼리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에 1탈렌트의 금화는 200명이 탑승하는 군함인 3단 노선 1척을 1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시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보다 약 70년 이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물가의 가치가 달라졌다고 해도 12만 탈렌트라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페르시아 제국이 가진 부는 그리스인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발행했던 다릭 금화의 위상은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발행하는 달러화와 같았다. 그처럼 다릭 금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리스인들은 다릭 금화를 갖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 군대에 복무하는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 망해가던 다리우스 3세 시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쫓겨다니던 다리우스 3세의 곁에 최후까지 있으며 그를 경호한 상대는 페르시아에 복무하던 2천 명의 그리스인 용병들이었다. 그 밖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한테 복수를 하겠다며 페르시아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른 그리스인들보다 그에 맞서서 페르시아에서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더 많았다. 그에 반해 그리스는 스파르타 왕 데마라토스가 페르시아 황제인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말했듯이, "본래부터 가난을 타고 난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늘 풍요로운 지역인 아시아를 정복하겠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책인 <역사>에서 만약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를 점령한다면, 얻을 수 있는 부는 감히 제우스신과도 견줄 수 있을 것이다. 페르시아에는 금과 은과 구리, 곱고 아름다운 직물, 노예와 곡물과 가축 등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휘 아래, 아예 페르시아 제국을 통째로 정복해서 다릭 금화들을 완전히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었고 그것을 실현시켰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원정에 동참했던 그리스인 데마라투스는 오늘 이전에 죽은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의 왕좌에 앉는 모습을 못 보았으니,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모른 채 죽었구나!라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출처: 전장을 지배한 무기전 전세를 뒤바꾼 보급전/ 도현신 지음/ 시대의창]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리다가 당시의 세계 최강대국을 정복하여 그 엄청난 부를 모조리 차지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리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